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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채로 전락한 산상수훈

11 Jun

 

다음은 어느 목사님의 컬럼입니다.

이 목사님의 내용이 진리라는 뜻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 공감이 간다는 생각으로

퍼 담았습니다.  아무쪼록  ‘팔복’에 대하여  왜곡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기복신앙의 천재꾼들인 한국교회가 산상수훈을 복을 만들어 내는 복채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번영신학자들은 그들의 습관대로 산상수훈도 거꾸로 대입하기 시작했다.

천국을 소유하려면, 축복을 받으려면,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 위로의 축복을 받으려면 애통해야 한다.

땅을 기업으로 받으려면 온유해야 한다. 배부르게 잘먹고 살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긍휼히 여김을 받으려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한다. 하나님을 보기위해서는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으려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천국을 소유하려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아야 한다.

결국 복 받기 위해 울어도 보고, 온유한 척 하기도 하고, 복 받기 위해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 몇푼

던져 주기도 하고, 복 받기 위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척 해보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들은 복 받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들이 생각하는 복이란 철저히 이 땅에서 받는

부귀영화를 말한다. 과연 산상수훈이 이런 뜻이었던가?

놀랍게도 이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은혜로 바꾸어 놓으신 진정한 축복의 법칙을 다시 율법으로 되돌려

놓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산상수훈은 하나님나라 윤리이다. 선행과 노력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은혜의

법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상수훈을 율법으로 되돌려놓고 말았다.

그럼 산상수훈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애통하는 것 그 자체가 복이며, 슬퍼 눈물 흘리며 평생 가슴앓이를 해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면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이다. 자기 연민이나 억울함 또는 서러움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흘러내리는 고통의 눈물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복되다는 것이다. 시대적인 사명선언문을 선포하지만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놀림과 핍박만 받아야 했던

선지자들. 그러기에 그토록 눈물만 흘려야 했던 예레미아. 하나님의 마음을 눈물로 대신한 그는 정녕

복 받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울었다고 그가 나중에 참선지자로 인정받고 물질적 보상까지 받았단

말인가?

산상수훈은 복 받을 조건을 말한 것도 아니고, 복 받을 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을 가르친 것도 아니다.

산상수훈은 천국백성의 참다운 축복된 모습을 그린 것이다.

즉, 천국의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가난하게 살았더니 드디어 천국을 선물로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 자체가 천국이요 천국의 삶이라는 말이다. 천국의 사람은 온유한

사람들이다. 온유한 사람이 되면 땅을 기업으로 선물로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온유한 사람이 사는 곳은

그 어느 곳이나 하늘의 땅의 기업이다. 천국의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보면 배부르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배가 고파도 목이 말라도 배부른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천국의 사람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다. 그렇게 핍박을 받으면 천국을

보상으로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천국의 사람이 핍박받는 이유가 천국에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난, 고통, 애통, 핍박, 주림과 목마름 그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나타난다면 그것이 가치있고 복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복은 패러독스이고 미스테리이다.

이렇게 복된 산상수훈을 번영복음, 긍정의 복음이 장애복음으로 만들어 놓았다. 우리에게 주신 고통과

장애를 믿음으로 극복하면 반드시 건강과 물질적 축복이 따라온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복음을 훼손한

장애복음이다

복을 끌어내기위해 억지 애통과 가난의 흉내, 위선적 의로움을 실습하는 바리새인처럼 살지 말라고

역설하신 산상수훈이 오늘날 더 심한 신바리새인을 양산해 내고 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주님의

은혜요 이익이 되지 않으면 억울한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건 산상수훈의 삶이 아니다.

산상수훈은 소외된자, 배고픈자, 고통당하는 자, 눈물흘리는자, 핍박을 당하는 자의 이미지를 통해

하늘나라의 비밀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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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켬 06/11/2012 in 퍼 담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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